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포드 (문단 편집) == 일생 == [[http://kmdb.or.kr/column/john_list_view_new.asp?page=2&choice_seqno=2&searchText=|이 글]]을 참고·요약하여 서술한다. 존 포드는 [[1894년]] [[아일랜드계 미국인|아일랜드 이민자]] 부부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존 마틴 피니(''John Martin Feeney'')이지만, 그는 [[견진성사]] 때 선택한 숀 알로이셔스 오피니(''Sean Aloysius O’Feeney'')를 본명으로 쓰길 좋아했다. 술집과 농장 일을 했던 포드의 집안은 중산층과 중하층을 오르내렸으며, 포드는 학창 시절에도 배달부, 농장일 보조, 식당 종업원 등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독서광이며 미술과 어학에 재능이 있었지만[* 감독으로 활동하며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하와이어]], [[아일랜드어]], [[히브리어]]에다 [[나바호]]족의 언어까지 익혔다고 한다.] [[수포자|수학은 낙제했던]] 포드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다. 메인 대학교에 들어가지만 몇 주 만에 그만두고,[* 수업내용이 맘에 안 들어서 그냥 [[자퇴]]했다고 한다.] 허드렛일을 전전하다 1914년 7월 17일 무일푼으로 그의 형 프랭크 포드가 활동 중인 할리우드에 도착한다. 존 포드보다 13살이 많은 프랭크는 16세에 결혼하고 곧 이혼한 뒤 서커스단에 합류했다 종적을 감췄다가, 10여 년 만에 [[조르주 멜리에스|멜리에스]]의 영화에 배우로 등장해 극장에 갔던 가족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존 포드가 할리우드에 도착할 무렵 프랭크는 프랜시스 포드라는 이름의 감독-배우-작가로 [[유니버설 픽처스|유니버설]]에 제작사를 갖고 있는 스타 영화인이었다. 존 포드는 형의 도움으로 유니버설의 소품 담당 자리를 얻고 이후 스턴트맨, 단역, 조감독으로 일의 범위를 넓혀갔으며, 1917년 '잭 포드'라는 이름으로 첫 장편 〈스트레이트 슈팅〉을 연출한다. 1921년 [[20세기 폭스|폭스사]]로 이전했고, 1923년부터 '''존 포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24년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철마〉 이후 존 포드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지며 성공적인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형 프랜시스의 이력은 존 포드의 이력과 반대로 20년대부터 몰락해가지만, 동생에게 미친 영향은 작지 않았던 것 같다. 프랜시스의 영화 동료이자 인류학자였으며 존 포드의 배우이기도 했던 프랭크 베이커는 존 포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 깨달은 건 존 포드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진짜 존 포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칠고 무례하고 냉소적인 존 포드와는 너무 다르다. 진짜 존 포드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존 포드는, 다정하고 감상적이고 부드러운 또 다른 존 포드를 보호하기 위해 포드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다. 존 포드는 엄청난 열등감으로 심각하게 고통받았고 그 열등감의 밑바닥에 그의 형이 있다.”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음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평생 군인을 동경했고 해군 장교를 꿈꿨다. 그러나 낙제와 근시로 인해 번번히 군입대에 실패했다. 그래도 그는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친구들 도움으로 1934년에 예비역 [[미합중국 해군|해군]] [[소령]] 계급을 얻게 되고, 정보 제공 활동을 자처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포드는 동료 영화인들을 모아 야전 촬영단을 조직한다. 성원들이 나이가 많고 야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촬영단은 해군에 의해 거부당하지만, 곧 [[OSS]] 소속 부대가 되고 존 포드는 촬영단의 지휘관이 되어 하와이와 북아프리카 등의 전투 현장에 투입된다. 1941년부터 종전까지 4년간 이 부대는 여러 편의 전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포드가 미드웨이 섬에서 직접 [[미드웨이 해전|일본군의 공습과 미군의 반격]]을 찍은 "''The Battle of Midway''"로, 포드는 촬영 도중 파편에 맞아 꽤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1944년에는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 서부극의 고전 걸작 〈'''[[셰인(영화)|셰인]]'''〉(1953)의 감독으로 가장 유명하다. 〈[[젊은이의 양지(영화)|젊은이의 양지]]〉(1951)와 〈[[자이언트(영화)|자이언트]]〉(1956)로 [[아카데미 감독상]] '''2회''' 수상자. 2차대전 당시 미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와 함께 육해군 합동 촬영단을 이끌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상 기록을 남겼는데, 포드는 두 눈으로 목격한 상륙해안의 참상을 견디지 못하고 작전 종료 후 사흘 동안 장교숙소에서 술에 절어 지냈다고 한다. 그가 거칠고 과묵한 외면 아래 얼마나 섬세한 감수성을 감추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다. 종전 후 [[명예]] [[미합중국 해군|해군]] [[준장]]으로 제대한 포드는 죽기 5개월 전인 1973년 3월 31일, 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식에 참여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과 명예 [[대장(계급)|대장]] 진급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youtube(x3on1lPH6OA)]|| ||{{{#!wiki style="text-align: center" 제1회 AFI 평생 공로상 수상식 中. 무려 [[리처드 닉슨|미국 대통령]]이 참석해 그의 [[공로]]를 기렸다.}}}|| [[1973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1917년 [[무성영화]] 시절부터 연출을 시작해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14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